1970년대 ‘3핵 도시구상’으로 함께 출발했지만 반세기 만에 명암 갈려
강남은 학군과 주거 수요를 키웠고, 여의도는 금융위기와 재건축 지연에 발목 잡혀

강남과 여의도는 서울의 미래를 이끌 핵심 거점으로 함께 개발된 지역이다. 1970년대 서울시의 ‘3핵 도시구상’에서 나란히 새로운 중심지로 낙점됐지만, 반세기가 지난 지금 두 지역의 위상은 크게 달라졌다. 강남은 교육과 주거를 기반으로 대한민국 부동산 시장의 중심에 섰고, 여의도는 금융 중심지라는 상징성은 유지했지만 외환위기와 글로벌 금융위기, 재건축 지연이 겹치며 성장 속도가 크게 둔화됐다.
같은 출발선, 초반엔 여의도가 앞섰다
두 지역의 개발은 비슷한 시기에 시작됐다. 여의도는 밤섬을 폭파해 나온 토사로 제방을 쌓으며 개발 기반을 마련했고, 강남은 1969년 제3한강대교(현 한남대교) 개통과 1970년 경부고속도로 개통을 계기로 서울 도심과 연결됐다. 같은 해 서울시는 영동(강남) 지역에 60만명이 거주하는 신시가지를 조성하는 ‘남서울 개발계획’을 발표했다.
1970년대 중반 서울시는 기존 도심과 함께 여의도·영등포, 강남·잠실을 새로운 성장축으로 육성하는 ‘3핵 도시구상’을 내놨다.
이 당시 여의도의 성장세는 상대적으로 더 가팔랐다. 아니 겉보기에는 그랬다. 1973년 ‘기업공개촉진법’ 시행으로 상장기업이 빠르게 늘었고, 1979년 증권거래소가 명동에서 여의도로 이전하면서 증권사들도 잇따라 자리를 옮겼다. 국회의사당과 방송사, 금융기관이 집적되면서 여의도는 ‘한국의 맨해튼’이라는 별칭을 얻었다.
다만 그 과정이 순탄했던 것만은 아니다. 애초 여의도 개발을 이끌던 김현옥 서울시장은 철거민 이주용으로 지은 와우아파트가 붕괴하는 사고로 경질됐고, 후임 양택식 시장이 마스터플랜을 대폭 수정하면서 국회의사당 부지를 제외한 상당수 땅이 1970년대 중반까지 빈 나대지로 방치돼 있었다.
증권가 형성도 예상보다 더뎠다. 1979년 증권거래소가 이전한 뒤에도 정작 증권사들은 “모래 땅이라 흉하다”는 풍수지리적 이유와 “정보를 얻기 힘든 외딴 섬”이라는 인식 때문에 이전을 꺼렸고, 본격적으로 여의도에 집결한 것은 1980년대 호황을 거친 1990년대 중반에 이르러서였다.
반면 강남은 도로와 택지가 먼저 조성된 신도시에 가까웠다. 지금과 같은 프리미엄을 기대하는 시각은 많지 않았다. 오히려 초기엔 실패에 가까웠다. 1971년 논현동 공무원아파트, 1972년 시영 단독주택은 처음엔 희망자를 받으려 했지만 지원자가 모자라 공무원들을 반강제로 이주시켜야 했다. 그마저도 기반시설이 부족해 다시 강북으로 돌아가는 ‘강북회귀현상’까지 벌어졌다.
정부가 투기 억제를 풀고 세금까지 면제해주는 특별법(1972년)을 만들었지만 오히려 투기세력만 몰렸고, 이듬해 1차 석유파동까지 겹치며 강남개발은 한때 좌초 위기에 놓였다. 1970년 서울 인구의 76%가 여전히 강북에 몰려 있던 시절, 지금의 강남 일대는 그야말로 허허벌판과 논밭뿐이었다. 반포동조차 원래 저습지라 아파트를 짓기 전 매립공사(1970~1972년)부터 거쳐야 했을 정도다.
다만 규모만큼은 처음부터 여의도와 격이 달랐다. 애초 313만 평으로 계획됐던 영동 구획정리지구는 경부고속도로 건설을 계기로 지주들의 땅을 확보하는 과정에서 520만 평으로, 1970년대 후반에는 937만 평까지 늘어났다. 여의도 전체 면적(약 87만 평)의 10배가 넘는 초대형 프로젝트였던 셈이다.
강남은 학교를 얻었고, 여의도는 금융에 걸었다
두 지역의 운명을 가른 결정적 차이는 교육이었다. 1970년대부터 경기고와 서울고, 경복고, 용산고 등 주요 명문고가 강남으로 이전했고, 1976년 강남 아파트지구 지정 이후 대규모 주택 공급이 이어졌다. 학교를 따라 가족 단위 인구가 이동했고, 학원과 생활 인프라가 함께 형성되면서 지금의 8학군이 만들어졌다.
교육은 강남에 반복 가능한 주택 수요를 안겼다. 자녀 교육을 위해 강남으로 이주하려는 수요가 이어졌고, 이는 다시 집값 상승으로 연결됐다. 학군과 주거 수요가 서로 상승효과를 내는 구조가 자리 잡으면서 강남은 주거 중심지로 빠르게 성장했다.
여의도는 다른 길을 선택했다. 금융산업을 성장 동력으로 삼았지만 국제 금융시장과 경기 변동의 영향을 직접 받을 수밖에 없었다.
1980년대 증권사들이 여의도 제2증권타운으로 이전하며 금융 중심지로 자리 잡았지만 1997년 외환위기를 거치며 상당수가 구조조정을 겪거나 사라졌다. 2000년대 들어 정부는 한국투자공사를 출범시키고 국제금융도시 조성을 추진했으며, 서울국제금융센터(IFC) 개발도 시작됐다. 그러나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로 해외 금융회사 유치와 투자 계획이 차질을 빚었다.
이후 미래에셋대우는 중구 수하동으로, 대신증권은 명동으로 사옥을 옮겼다. 금융 중심이라는 상징성은 유지됐지만 금융회사가 반드시 여의도에 있어야 하는 시대는 지나갔다.

재건축도 한 세대 늦었다…여의도의 마지막 승부수
두 지역의 격차는 재건축에서도 확인된다. 강남은 개포와 반포, 잠실 등 주요 단지가 재건축을 마치거나 후속 사업을 진행하면서 주거 경쟁력을 한 단계 끌어올렸다. 새 아파트 공급과 학군, 생활 인프라가 맞물리며 집값 상승이 이어졌다.
반면 여의도는 사업 추진이 번번이 늦어졌다. 1971년 준공된 시범아파트는 2008년 첫 재건축 추진이 무산됐고, 2016년 신탁 방식으로 재추진돼 2017년 안전진단을 통과했지만 2018년 서울시 도시계획위원회 심의에서 다시 제동이 걸렸다. 사업이 본격적으로 속도를 낸 것은 2021년 신속통합기획 대상지로 선정된 이후다.
강남 주요 단지들이 이미 한 차례 재건축을 마친 사이 여의도는 이제 첫 번째 재건축 사이클을 시작하는 단계다. 시장에서는 시범아파트를 비롯한 노후 단지들의 정비사업이 완료되면 여의도의 주거 가치도 다시 평가받을 것으로 보고 있다.
여의도는 최근 금융중심 지구단위계획을 재정비하고 노후 주거지를 재건축하는 등 새로운 변화를 시도하고 있다. 금융 기능에 주거와 문화 기능을 결합한 복합도시 전략도 추진 중이다.
다만 반세기 동안 벌어진 격차를 단기간에 좁히기는 쉽지 않다는 평가가 나온다. 강남은 학군과 재건축이라는 두 축을 바탕으로 지속적인 주택 수요를 만들어냈다. 여의도는 금융이라는 산업 기반에 의존했던 만큼 정책과 경기 변화의 영향을 더 크게 받았다.
같은 도시계획에서 출발한 두 지역은 결국 다른 성장 공식을 선택했다. 강남은 사람을 끌어들이는 도시가 됐고, 여의도는 자본을 모으는 도시를 지향했다. 반세기 뒤, 현재 두 지역의 집값과 도시 경쟁력은 교육과 주거 수요가 얼마나 강력한 성장 동력이 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가 됐다.